뻐꾸기 목사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아 위탁하는 새가 있다. ‘뻐꾸기’이다. 주로 붉은 머리 오목눈이 새나 딱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둥지를 튼 새들은 그것도 모르고 뻐꾸기의 알을 애지중지 품는다.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큰 몸짓으로 친어미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떠밀어 버린다. 먹이를 독식하기 위한 살상행위이다.
그것도 모르는 붉은 오목눈이 새나 딱새는 뻐꾸기 새끼를 제 새끼인 양 정성껏 키운다. 자기 새끼를 다 죽인 뻐꾸기 새끼를 저보다 몸짓이 훨씬 클 때까지 먹이를 준다.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그것을 보고, 미련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분통이 터졌다.
뻐꾸기는 흔히 산지에 서식하는 여름 철새로 우리나라에서는 5월에서 9월 사이에 볼 수 있다. 겨울철에는 다시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미얀마로 돌아간다. 뻐꾸기는 얌체다. 의무와 책임은 지지 않고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며 풍성한 먹이만을 즐기는 새 같다.
우리나라 1970년대의 늦봄은 일 년 중 가장 배고픔의 끝자락이었다. 그때 봄마다 뻐꾸기는 앞뒤 동산에서 구슬프게 울어댔다. 어쩌면 뻐꾸기 우는소리가 빈민의 마음을 대신하는 애한과 같았다. 그래서 뻐꾸기는 정서적으로 친근한 새다. 하지만 뻐꾸기의 정체성을 알고부터는 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뻐꾸기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추억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시대의 사람도 뻐꾸기처럼 사는 인생이 있다. 자기가 낳은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는 사람이다. 우리 주위에는 불손 가정이 많다. 편모나 편부, 조손가정도 증가 추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아이를 버리는 부모들도 있다. 연령이나 계층도 다양하다. 짐승도 제 새끼는 키우는데, 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리는 것은 뻐꾸기 친족이 아닐까 의심된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사랑이 많아야 할 교회에도 뻐꾸기가 있다. 그것도 교인도 아니고 목사가 그렇다. 자기만 살겠다고 좋은 곳으로 떠나버린 목사가 있다. 심지어 좋은 것을 다 가지고 먼 곳으로 도망가 버려서, 한 번은 교인들이 물어물어 찾아간 적도 있다.
어떤 목사는 사례비가 적다는 이유로 후임자도 정하지 않고, 한순간에 교회를 떠나 버리기도 했다.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더 나쁜 목사를 만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상위기관에서는 더 품위 없는 목사를 보내려고 했다. 분노한 교인들이 노회를 탈퇴하고 자체적으로 후임자를 청빙하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성직자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사례비를 많이 준 곳으로 날아가 버린 뻐꾸기 목사를 그곳에서 만났다. 서로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 목사님 아닙니까?”
“어떻게 집사님이?”
“저도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됐거든요.” 서로의 안부를 물었지만, 만남 그 자체가 찜찜했다.
요즘은 교인이 둥지를 떠나 버린다. 코로나로 인한 후유증도 있겠지만, 첨단 문명과 다양한 문화 속에 신앙생활을 하기란, 무척 힘이 든 모양이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세상 살기도 힘드는데 교회에 나갈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짜증을 내는 것 같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교인들을 찾아가면, 부담스러운 얼굴로 변명하듯 말한다. 그다음에는 새로운 이유가 생긴다. 마치 줄다리기와 같다.
지난 월요일에는 교회 사역자가 걱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교회에 한 청년이 비밀을 요구하며,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문의 하는 것이었다. 나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사례비도 많지 않은 여자 사역자에게···. 나는 그 사역자에게 담임목사를 빌미로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날 오후가 되자, 이번에는 그 청년의 전화가 내게로 왔다. 오전에 사역자로부터 들었던 내용과 같이 비밀을 요구하며, 돈을 빌려 달란다. 속으로는 얼마나 급하면 저럴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고, 어디에 쓸 것인지 차분하게 자초지총 물어보았다. 더구나 성실하게 직장에 다니는 청년이기에 용도가 더 궁금했다. 그는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주식 투기’로 폭망한 것이었다. 현금은 물론이거니와 신용도가 낮은 은행에서 높은 이자의 대출까지 받아서 주식으로 바닥을 친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매월 갚아야 할 높은 이자뿐이었다. 대출이자가 급여에서 1/3이 더 되었다. 대출원금도 월급으로 상환하기는 버거운 금액이었다.
그 청년은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나이도 30대 후반이라 결혼도 해야 하고 몸도 약한 어머니도 섬겨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 문제만 바라보고 걱정만 하면 더 낙심하고 좌절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없다. 실패도 젊었을 때 하는 게 낫다. 이 위기를 잘 넘기면 인생에 지혜와 능력이 될 것이다. 우리 그런 의미에서 만나 저녁 식사나 하자.”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인생은 예행연습이 없기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실수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이 있다. 일례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반드시 전문서적이나 좋은 선배들에게 자문을 해야 한다. 특히 곧은 자와 같은 성경은 진리이자 인생의 지침서가 된다고 거들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허탈했다. 내가 은행원을 하다가 목회자가 된 것을 알면서도, 그 청년은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러서야 내게 말하다니. 여태껏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것은 모두 헛것이 되었네. 이를 어쩌나?! 그러고 보면 나도 뻐꾸기 목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