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나팔

행 11:19-26/그리스도에 속한 자들/2021. 06. 13. 주일 낮 예배 설교문

선대하는 청지기 2021. 6. 13. 13:09

1. 실화) 손 마사요시를 아시나요?

일본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손정의 회장인데요. 그는 재일교포 3세로 기업 운영 때문에 일본에 귀화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이라는 성씨만은 지키고 싶어서 일본이름을 손 마사요시로 개명하려고 해답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이 그 이름을 거절했어요. 이유는 일본에 이라는 성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 성을 지키려는 의도를 일본법원이 알고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이었어요. 이에 대한 손정의 회장이 세운 전략은 이렇습니다. 그의 아내가 일본인인데요. 그는 와이프 성을 먼저 손씨로 개명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일본에 손씨 성이 있게 된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손씨 성을 유지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재일교포로 남아있습니다.

 

2. 성경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는데요. 본문 사도행전 11:26 26:28에 이어서 벧전 4:16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의 복수입니다. 이는 합성어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를 완전히 추종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맨 처음으로 안디옥 교회에 교인들에게 붙여진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3가지 정도의 설이 있는데요. 그중에 타당한 견해는 안디옥에 사는 불신자였을 것을 추측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늘 그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추종자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제국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고, 정적이었던 폼페이의 군인들을 폼페이인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서 그들의 특징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 그리스도인의 대표적 모델을 소개합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1장에서부터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를 대신하여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한 사람을 제비 뽑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사바라고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1:23)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제비에 뽑히지 못하여 사도의 수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중요인물 가운데 베드로, 바나바, 바울을 나란히 등장을 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바나바가 비록 사도의 직분을 받지 못했지만,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음을 후세에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36-37에 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델인 바나바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속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바나바는 더 이상 잠시 잠깐뿐인 죄악 된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1:19-21를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단일민족의 작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에 인간을 구원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로마서 1:16에서 증거하기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여기서 헬라인은 이방인들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안디옥에서도 헬라인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21). 이를테면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복이 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음을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는 결단을 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합니다(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 선교사가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 이었지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바나바가 이방지역 안디옥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자, 안디옥 교회는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전염병처럼 갑절로 증가되었습니다. 소똥이, 말똥이, 개똥이··· 순자, 애자, 전자, 말자··· 등등이 무엇에 이끌리는 것처럼 안디옥 교회를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불렀을까요?

 

첫째,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하는 사람들(11:23).

예수님은 믿음으로 영접하면, 은혜를 겸하여 고난을 받게 됩니다. 23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초대교회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반드시 박해와 환란이 받았습니다. 그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시험과 고난에 넘어지고 배교할 수밖에 뻔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박해를 이기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굳건한 믿음으로 항상 주님과 함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배와 기도와 전도와 심방과 섬김의 봉사를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일들을 날마다 행할 때, 믿음이 굳건하게 되고 주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둘째,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11:24).

성령이 임하면 그 후부터 그 사람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바나바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받은 자에게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들은 안디옥 교회도 바나바와 같이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로 변화 되었을 줄 믿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믿음도 충만해 집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한마디로 예수쟁이로 바뀌게 됩니다.

 

셋째, 용서하고 주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9:26-27; 11: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9:26-27)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자, 바나바는 그의 과거에 죄를 용서하며, 사도들과의 교제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에서 주님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 바울의 고향인 다소까지 찾아가 데려온 후에 그와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나바가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수였던 바울을 사랑으로 용서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가 되어주며, 더 나아가 바울을 주님의 일을 같이 하는 동역자로 세워줍니다. 이런 바나바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풀풀 풍겨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면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행복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한 가지 삶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행복이 아닐까요?! 4세기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행복을 갈구한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무엇도 이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다. 다른 것을 갈망하는 사람도 결국 목표는 이것뿐이다.”라고 했습니다.

 

17세기 철학자 파스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예외가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행복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제1조건으로 물질을 듭니다.

 

이 시대에 102세로 살아있는 김형석 교수님이 쓴 <백년을 살아보니> 책에서 그 고상한 철학 교수님도 젊을 때는 무엇을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가 물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위해 성취하고 싶은 인생의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충분히 돈을 벌고, 아이들이 잘 자라나고, 남들보다 성공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이룬다 해도 인생의 어느 순간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서녘 하늘에 황혼이 찾아올 때, 가을날 낙엽이 거리에 날릴 때, 세찬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칠 때, 가슴 깊숙이 비어있는 싸늘한 외로움과 공허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파스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방이 있다.”

 

여러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하나님 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다에서 마실 물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목은 마르고 갈증은 더할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떠나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평안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감격을 체험해 보십시오. 그토록 추구했던 행복이 이미 가슴 속에 채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라면 행복에 대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어디라도 행복이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이 다 사라져도 열려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바나바가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고, 변화된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 안디옥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 것을 가지고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인생은 절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진 인생에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진 인생은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진 인생은 항상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믿음의 사람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전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2:22-25)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핵심 즉 알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무엇보다 지혜롭고?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무엇보다 강하다고요? 사람보다 강하다고 증거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울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로 말하면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 후손들이 미국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바울이 그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학벌도 가말리엘 문화생으로 지금으로 비유하면 서울대 총장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권력은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로 비유하면 사법권과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이었는데요. 특별히 산헤드린공회 의장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을 정도로 촉망이 있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과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겁니다. 반면에 바울이 속한 유대교는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의 죽음과 부활은 기존의 유대교가 새롭게 생겨난 기독교를 제거하려는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칫 미치광이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그냥 놔두면, 유대교의 세력이 약해지고 새로운 기독교가 흥하는 세력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이 산헤드린공회 의장의 명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중에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다메섹 길에서 바울이 만나게 되지요.

 

예수님은 기세등등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바울의 눈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거꾸러지게 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 들러오는 음성과 하늘에서 바울에게만 내리 쬐는 태양보다 강한 신비한 빛으로 실명하게 하고 넘어뜨렸습니다. 생각하건대 아마, 바울이 세상에 태어나 그런 수모는 처음 겪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식으로나 권력이나 명예와 부귀로도 유대인들 중에 견줄만한 자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탄탄대로의 길을 걷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 자를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9:4)라는 말씀과 빛으로 한 순간에 넘어뜨려 약하고 어리석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깨닫고 고백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런데요. 바울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먼저 경험한자가 있었어요.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등장한 바나바입니다. 더 나아가 이방인 안디옥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나바와 바울이 체험한 살아계신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를 체험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4. 이제 설교를 요약하며 마치고자 합니다. 안디옥교인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한 사람들,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 용서하고 주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